다정소감
저자: 김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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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 추천

하이라이트
하지만 글 쓰는 일이란 결국 기억과 시간과 생각을 종이 위에 얼리는 일이어서 쓰면서 자주 시원했고 또한 고요했다.
그래도 내가 장장 40년 가까이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했다는 게 신선했다. 게다가 그 물건이 하이브리드 하거나 4차 산업혁명의 기색을 살짝 뿌려놓은 현대적 무언가가 아니라 이렇게 모양새도 용도도 단출한 김솔통이라는 것도.
동학 혁명의 나라에서 언제부터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의 위상이 이렇게나 턱없이 떨어진 것인지.
중년, 단체, 패키지여행,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빚어내는 어떤 편견. '여행부심'과 '예술부심'이 이중으로 빚어내는 어떤 오만.
지구력이 강해졌다든지, 기술을 하나씩 익힐 때마다 몸에 새겨지는 성취의 감각이 일상의 다른 일을 하는 데에도 고양감을 불러일으킨다든지,
위선이 위악보다 나았던 이유는, '선을 위조한다는 것'은 적어도 위조해야 할 선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기에 가능한 것이라 상대와 '선'에 대해 따로 합의할 필요 없이 엇비슷한 선상에서 대화할 수 있어서다.
언젠가부터 소위 말하는 '솔직함'이라는 것들에 지쳤다. 솔직함은 멋진 미덕이고, 나 역시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실하려고 노력하며,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곤 하지만, 솔직함을 무기 삼아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일종의 환멸 같은 게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솔직한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솔직한 나'에 대해 너무나 비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으니, 아무 노력 없이 손쉽게 딸 수 있는 타이틀이 '솔직한 나'여서 그런 것일까.
가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분투가 담겨 있다.
제아무리 신선한 개념을 담은 책이라도 나라는 낡은 필터를 거치면서 유실되는 의미들이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의식적인 의도가 반영된 시선으로 나에게 유리한 근거들을 모으고, 내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볼지도 모를 일이다.
독서량이 결코 지성의 척도가 될 수 없는 이유 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은 여러 충고 사이에서 최종 선택을 하기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많이 배워요.
나는 그동안 내가 기본 소양이라고 여겨왔던 것들, 사회가 기본 소양이라고 설정해 놓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가져다 써왔던 일들에 관해 생각했다. 그런 태도가 때로 무심코 지워버리는 것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지식의 양과 지식을 지혜로 응용하는 능력은 엄연히 다르고, 아는 것이 많은 것과 제대로 아는 것,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 역시 전혀 다르다.
내가 백지에 별생각 없이 점 하나를 찍고 말 때, 누군가는 그 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긴 선을 그리려 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알았어야 했다.
작은 기대일지라도 번번이 좌절될 때 조금씩 바스러지는 마음
- 저자
- 김혼비
- 출판
- 안온북스
- 출판일
- 20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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