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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김석원 - 에세이 추천

by 나 현재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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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저자 : 김석원
국내도서 > 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보통의 존재&#44; 김석원

하이라이트

감정이 글을 압도하게 되면 정작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담아낼 수 없게 된다.
글은 현실과 달라서 눈물의 양이나 표정의 절박함, 울음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내주는 진정성 등을 확인시켜 줄 수 없기 때문에 슬프다, 슬퍼죽겠다,라고 되뇌는 것만으로는 감정의 울림을 갖기 어려운 탓이다.
결국 슬프다는 나의 감정 상태를 보다 선명히 드러내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으려면 내가 왜 슬픈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흡인력 있게 서술해야 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 혹은 최소한 흥미라도 갖게 하기 위해 그것이 글쓴이 개인의 사적 경험을 단지 서술, 나열한 것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슬프다'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이 친구라 여길만한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대인관계에 관한 한 뻔간불이 켜졌다고 보면 됩니다. 없다고 느끼니까 자꾸 총합을 내보고 확인하려 드는 거거든요.
친구지간이라는 것은 마치 연애하는 남녀 사이만큼이나 복잡 미묘했고, 관계 또한 수평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남녀 사이에도 더 좋아하는 사람과 덜 좋아하는 사람 간에 권력관계가 형성되듯이, 친구끼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가장 친하다고 여기고 있는 친구와 나와의 관계가 결코 대등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수평적인 사이라면 내가 친구의 태도에 부당함을 느꼈을 때 정당히 어필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 관계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죠. 다시 말해 내가 친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문제 제기를 했을 때, 혹여 그것이 나의 피해의식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더라고, 그쪽에서 그것을 풀기 위해 노력할 의지가 있을 만큼 그쪽에게도 내가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따져보니 그다지 유쾌한 결론이 나지 않았던 겁니다. 판단한 건데 친구는 나의 항의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고 관계는 그 즉시 깨어질 만큼 신뢰와 유대는 약했으며 그저 내 입장에서만 더 아쉽고 구차한 사이일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 해도 관계를 쉽사리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만큼 여러 환경적, 상황적인 이유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 친구는 내가 속해 있는 무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만약 그와의 관계를 포기했을 때 나의 위치는 덩달아 어떻게 위협받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나의 생활은 어떻게 변화게 될 것인가 하는 정치적인 고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려서는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그저 한동네에 살고 같은 유치원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존재들이 커가면서 본격적인 자신만의 관계망을 맺어가게 됨에 따라 순수라는 단어는 점차 사라지고 여러 가지 정치적 고려와 취향의 문제 등을 따져가며 친구를 만들게 됩니다. 더구나 내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동적인 입장보다는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인 상황에 처해질 경우도 많기 때문에 친구라는 상품으로서의 자신을 단련시켜야 할 필요성마저 대두되게 되지요. 그러면서 때로는 이성친구를 만들 때보다도 훨씬 더 깊고 다양하고 복잡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보다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타인이란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나의 말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말이 될 수 있고, 나의 행동과 내가 빚어내는 모든 결과물들은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라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내가 지금 어느 곳에 서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친구라 부르며 이런 중요한 일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없거나 그 수가 많지 않을 때, 우리는 외롭고 또 고민하게 됩니다.

가치란 대립하는 것이라 했다. 하나밖엔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을 택하자니 일을 할 수 없고 일에 최선을 다하자니 몸을 돌볼 수 없다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과 좀 더 좋은 간판이 되어줄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 이러한 선택의 순간은 멈추지 않고 찾아온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고 결정은 저마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다 중요한 가치, 그보다 덜 중요한 가치들을 구분해 중요도에 따라 순위를 매겨두는데 이것을 '인생의 차트'라 한다. 보편적으로 생각해볼 때 상위에 랭크되는 것들은 건강, 가족, 일, 돈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데 결코 어떤 순위에도 함부로 놓을 수 없는 초월적인 가치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일반적인 기준으로 다른 것들과 저울질하면 순위는 말도 안 되게 내려간다.
당신은 친구를 포기하고 사랑을 택할 수 있는가? 가족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할 수 있는가? 왜 항상 사랑은 다른 무엇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이 많은 가치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며 배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사건건 다른 많은 것들과 대립한다. 일, 친구, 다른 존재에 대한 갈망, 돈, 가족, 자아실현과 같은 많은 주요한 가치들은 사랑 앞에서 선택을 종용받곤 한다. 뿐만 아니다. 사랑은 마음의 평화와도 정면으로 대립한다. 열정적인 사랑과 마음의 평화 중 사랑을 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평온한 마음과 의지가 되어주는 오랜 친구 같은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나 끓어오르는 마음과 맨 정신으로 바꿀 사람이 흔할까. 인간이 가지는 가장 고결한 가치이자 덕목으로 여겨지는 사랑은 이처럼 현실에서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한다. 사랑과 행복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데도 역시 행복이다. 행복하려고 사랑을 했는데 사랑을 해도 좀처럼 행복하지 않으니까. 즐거우려고 연애를 했는데 지옥을 경험하게 되는 일 같은 건 너무 흔하니까. 도대체 사랑은 몇 번째 순위일까. 누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사랑이라 했을까.
그래서 사랑은 0순위이다. 때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게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인생의 차트에서 사람은 경우에 따라 돈과 가족을 놓고도 저울질을 할 수 있지만,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되면 결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게 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보통의 존재
인생에 있어 하고 싶은 일이나 애착 같은 것 없이 그저 되는 대로 살아오던 그는 서른여덟이 되던 해 어느 날, 사랑과 건강을 한꺼번에 잃고 비로소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 방편으로 택한 것이 글쓰기였다. 그는 삶의 내밀한 부분들을 마치 현미경처럼 정밀히 포착해 낸 이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해 진한 경의와 애정을 표하고 있으며 책을 쓰는 동안 글쓰기는 이제 그에게 하나의 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보통의 존재』는 서른여덟. 무명의 작가 이석원이 마치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듯 정밀하게 잡아낸 보통 사람의 내면과 일상의 풍경이 가득한 산문집이다.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생과 관련된 거대하면서도 상투적인 주제들까지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내밀하게 파고들어가 아름답고 처연한 단상들을 만들어냈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건 결국 우리 모두가 겪어온 일들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던 책이다. 아무리 궁금해해도 알 수 없었던 그의 속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책. 이석원이 아무렇지 않은 듯 술술 풀어낸 언어의 강물 위에는 말하고 싶어도 너무나 내밀해서 함부로 꺼낼 수 없거나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왔던 이야기들이 흐른다. 독자들은 그의 이야기 앞에서 큰 숨을 들이쉬며 멈칫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게 될지도. 하지만 곧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숨을 고르며 다시 그의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갈 것이다. 그 안에서 이석원은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결국에는 보통의 존재로밖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실은 쓸쓸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위안인지도 모른다.
저자
이석원
출판
출판일
2009.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