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지만 안녕
저자 : 황경신
국내소설 > 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하이라이트
너무 많은 사랑을 해본 사람도,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 사람도, 모두 급격한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한동안 자신과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
한동안? 그렇다. 사랑이 끝나는 칠백팔십칠가지 이유,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면 딱 한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 그 이유로 인해 그 사랑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약속들 중에서 가장 부질없고 무의미한 것은 연인끼리 주고 받는 사랑의 약속이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거나 그런 종류의 약속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도, 그 약속이 실현될 가능성에 대한 완벽한 믿음은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새끼손가락 걸고 사랑을 맹세하는 순간, 우리들은 '그렇게 하겠다'가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다'라고 소망할 뿐이다. 기대할 뿐이다. 많이 기대하고 소망하지만, 그 마음이 깊고 끔찍하다고 해서 기대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한없는 희망은 절망과 맞닿아 있다. 사랑 속에 이별이 존재하고, 봄 속에 겨울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의 약속 안에는 텅 빈 동굴과 같은 허무함이 존재한다.
이별이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이 끝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막 시작될 때, 사랑이 그 정점을 향하여 솟구칠 때, 또한 사랑이 내리막길로 미친 듯이 치달을 때, 심지어 사랑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순간마다 존재하고 순간과 순간 사이에 존재한다. 만약 이별이란 것이 얌전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사랑이 끝난 후에 찾아오는 것이라면, 우리를 그토록 아프게 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나의 이론을 옳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이 끝나 버린 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과 이별하는 일이 우리를 아프게 할 리 없으니까. 그것은 따뜻한 봄의 햇살 속을 날카롭게 통과하는, 또한 풀어헤친 방심한 옷깃 속을 파고드는, 남아 있는 겨울 같은 것이다. 매 순간 이별을 느끼기 때문에 그 사랑이 애틋하고 눈물겨운 것이고, 사랑이 그토록 소중하기 때문에 이별 또한 하나의 가슴을 충분히 망가뜨릴 만큼 잔인한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이별의 전부는 아니다. 이별은, 이별 후에도 온다. 완전히 이별한거라고 생각한 다음, 그 이별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날들이 무수하게 반복된 후에도, 이별은 새삼스럽게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첫번째 이별처럼 즉각적인 아픔을 동반하지는 않지만, 다른 의미에서 더욱 잔인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속에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를테면 겨울 속의 따뜻함 같은 것.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이란 잔인함의 속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이렇다 할 만한 시작과 끝이 있었다면, 그런 기다림의 시간은 없었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따라서 끝을 낼 수도 없었다. A는 B와 끝내기 위해 기다렸다. 두 번째로 B가 돌아왔을 때, A는 몹시 지쳐 있었다. 그래서 엉장진창인 상태로 B를 만났다. A는 엉망으로 이야기하고 엉망으로 화를 내고 엉망으로 울었다. B가 당황한 것이 당연하다. 모든 일은 B가 없는 사이에, A에게만 일어났기 때문이다. B는 어리둥절한 채 A를 보다가, '그녀를 위해' 이별을 고했다. 결국 두 사람에게 시작은 없고 끝만 있었던 셈이다. A가 절망한 이유는 B가 자신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산산조각 난 자신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난 어쩌면 A가 조금 더 괴로워하기를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A가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었던 동안, 거기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동안, A는 점점 깊어지도 아름다워졌다. A는 B를 잊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요리를 하고 꿈을 꾸고 약을 먹고 침묵했다.
시간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라고 나는 줄곧 생각해 왔다. 인생에는 천 년 같은 일 분이 있고 동시에 일 분 같은 하루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기다림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내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그 카페가 떠올랐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떠올랐을 때, 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시간이란 분명 절대적으로 상대적이지만, 또한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아주 긴 오 분은 단지 아주 긴 오 분일뿐, 아주 긴 일 년이 될 수는 없다. 아주 짧은 한 시간은 아주 짧은 십 분과 완전히 다르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싸웠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국 끝났다. 나는 그곳에 있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또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시간만큼 긴 시간은 달리 없을 것이라고 여전히 나는 생각한다. 기다리는 대상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 시간은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고 끝을 알 수 없는 우물이 된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 시간을 떠올리면 아득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때 난 그 곳에서 평생을 기다렸다,라고.
어째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괴로움들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일까. 난 늘 그것이 이상했다. 물론 어떤 종류의 괴로움은 너무나 깊어서, 우리의 심장 한쪽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처가 언제까지나 상처인 채로 남아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 하고, 그것은 하나의 흉터로 남는다. 누구나 자신 속에 그런 흉터를 가지고 있다.
가끔 어떤 코드에 의해 상처를 입었을 당시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새삼스럽게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때보다 더' 괴롭지는 않다.
그러니까 상처를 입었을 때는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 저자
- 황경신
- 출판
- 큐리어스(Qrious)
- 출판일
- 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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