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떤 날 :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김소연 , 박세연 , 성미정 , 요조 , 이병률 , 이제니 , 위서현 , 장연정 , 최상희

by 나 현재 2023. 6. 29.
728x90

어떤 날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저자 : 김소연 , 박세연 , 성미정 , 요조 , 이병률 , 이제니 , 위서현 , 장연정 , 최상희

국내소설 >  / 에세이 > 한국에세이

 

어떤 날&#44; 요조&#44; 이병률

하이라이트

여행은 세상을 피하고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어야만 한다.
린위탕 <생활의 발견> 중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너무 똑같다. 지루하다.

달력을 보면 자꾸 깜짝 놀란다. 벌써 날짜가 이렇게 지났나 하고. 그동안 나는 무얼 했나 하고.
자꾸 원치 않은 길 위에 서서 원치 않은 방향으로 이끌려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매번 애를 쓴다. 욕망을 점검하고 취사선택을 하느라, 방향을 측정하면서 이탈과 탑승의 타이밍을 체크하느라.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 지나치게 용의주도해지고 지나치게 예민해진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피로하고 피로하다. 에워싼 것들을 적절하게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지치기 일쑤다. 어떨 때는 멍청이가 된 것 같고, 어떨 때는 쪼다가 된 것 같고, 어떨 때는 비열해지는 것만 같고, 어떨 때는 비루해지는 것만 같고, 대부분 낙오되는 것만 같다.

시인 정지용은 여행을 '이가락'이라 했다. 집 떠나는 즐거움.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우선 근사한 여행지를 전제하지 않아서 좋다. 그저 집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 뜻이 좋다. 집을 떠나면 우선 나는 달라진다. 낯선 내가 된다. 낯설지만 나를 되찾은 것 같아진다. 내가 달라진다는 게 좋다. 달라질 수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좋다.

낯선 생활방식을 가진 낯선 사람을 목격하는 어떤 아침에 대해 나는 시를 썼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달라진다. 익숙했던 내가 낯설어진다. 익숙했던 것들이 각질처럼 떨어져나가고 낯선 것들이 익숙해지는 나를 만난다. 나의 시선은 타인에게서 시작되어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되돌아온 나의 시선에는 다행스럽게도 나에 대한 온정이 회복돼 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에겐 이게 우선 가장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날의 미래 속에 있다.
다시 과거 속으로 떠밀려가면서 미래의 과거를, 다시 과거의 미래를 들여다본다.
보이지 않는 머나먼 바다를 바라보듯이. 그 바다 위로 번져가는 빛. 눈이 시릴 정도로 환한 빛. 은빛은 빠르고 기억은 더디다. 순간을 산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걸을 때, 끝없이 걸을 때 나는 과거에 있는 것인가, 미래에 있는 것인가.
오직 현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 모호한 채로 명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나는 다시 과거와 미래를 밟으며 현재를 지나간다.

아름답고 싱그러운 햇살 아래에서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우리 뭐 할까'라는 그의 질문에 30분 내내
'그러게 뭐하지, 헤헤'라는 대답으로 그를 짜증나게 하는 나의 매력 없음을
자책하는 동시에, 그의 흰머리가 나 때문에 혹시 늘지는 않았는지
머리카락의 흑백 비율의 변화를 그 아름답고 싱그러운 햇살 아래에서 가려내야 한다.
어쨌든 가보는 거야, 에라~ 나도 모르겠다는 식의 무책임한 기분과,
어떠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도 다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이렇게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을
여행자의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

여행을 통해 내가 누리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타인의 낯선 세상, 사람이라는 색색의 풍경이였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고,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내 안에 잠든 언어를 꽃처럼 피워내주기를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숱한 고민이나 내면의 성찰이 아무리 깊고 정교한들 두 발로 느끼는 세상보다 생생할 수는 없으니, 고민이 많을 때면 발로 땅을 밟고, 발로 세상을 느끼려 한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면 간절했던 것,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의외로 빛을 잃으며 허상처럼 흩어진다. 사소해서 버리고 싶다 여겼던 것들이 의외로 선명한 생명력으로 빛나기도 한다.
'없어도 살아지는 것들'을 왜 그렇게 부여잡고 살았는지, '사소하다고 버리려 했던 것들'은 왜 이토록 소중한지 문득 깨닫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여행이 끝나면 필요한 것들만 남는 법이다.

 

 

 
어떤 날
『어떤 날』은 여행에 관한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책으로, ‘왜 여행을 떠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한다. 김소연, 성미정, 이병률, 이제니 등의 시인, 일러스트레이터 박세연, 뮤지션 요조, 아나운서 위서현, 여행작가 장연정, 최상희 등 9명은 저마다의 다른 색깔로 여행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인이 풀어놓는 여행 이야기에서는 시인의 낭독을 듣는 듯하고, 뮤지션이 써내려간 여행 이야기에서는 멜로디가 귓전을 파고든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만이 아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피,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도 하는 것 또한 여행이 될 수 있다. 뮤지션 요조는 강변북로에서 모르는 차를 따라갔던 ‘발길 닿는 대로의 여행’을 말하고, 아나운서 위서현은 늘 지나쳤지만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던 ‘오전 10시의 효자동 여행’을 담담히 적어 내려간다. 매일의 삶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신선한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저자
김소연, 박세연, 성미정, 이병률, 이제니, 요조
출판
북노마드
출판일
2013.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