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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블루 : 기억으로 그린 미술관 스케치>, 김영숙

by 나 현재 2023.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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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블루 : 기억으로 그린 미술관 스케치

저자 : 김영숙
국내소설 > 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하이라이트

누군가는 파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난 파리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기억' 한다.

시간이 바뀌는 곳에 서 있는 나, 셔터를 누른다.
사진을 찍는 그 순간 내가 목격했던 현장들은 과거형이 되어버린다.
사진은 늘 '그' 때를 기억한다.
그리고 현재 글을 쓰는 나의 가슴을, 앞으로도 영원히 뭉클하게 만들 미래를 고집한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하지 못한 죄는 타인은 알지만 스스로는 모른다.
그 둘을 스스로 구분하는 순간, 그 사랑을 잃을까 두려운 이들은 애초에 그것을 구별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세상은 다 아는데 자신만 모른다.
세상은 다 집착이라고 하는데 자신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도 첫 키스를 할 때 눈을 감았던 것 같다.
숨바꼭질할 때 제 얼굴만 가리면 남들이 찾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감으면 상대가 나를 못 볼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그 키스의 순간이다. 첫 키스가 복수형으로 이어나가는 동안,
나는 가끔 당돌하게 눈을 뜨고 상대를 본 적이 있다.
상대가 민망할까 봐 "안 봤어!"라고 거짓말을 한 적은 있지만, 나는 나에게 몰두하는 상대의 모습을
호흡이 아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곤 했다.
그리고 나에게 취해 있는 상대의 감은 눈을 사랑했다. 내가 힐끔힐끔 자신을 관찰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바보 같은 그 사람의 도취를 나는 사랑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생각건대, 내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사랑에 실패한 원인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그의 모습'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전조들이 늘 내 키스의 버릇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정말 몰랐다.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면서도 넘치지 않는, 그 절도 있는 열렬함으로 사랑하라고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가?
나는 왜 다른 것들은 다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데 왜 사람하고 사랑할 때만 늘 그 물을 성급하게 넘치게 했을까?
결국 그 흘러넘친 물이 나를 달아오르게 하던 불길마저 꺼트리고 난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식지 않는 미련의 뜨끈함을 생의 옷자락으로 동동 감아 안곤 했다.


그것이 바로 내 얼굴이었다.
당신이 보고자 하는 모습의 나도 있지만, 당신이 가만히 앉아서 당신 식으로만 판단하는 내 얼굴 뒤에는 분명 당신이 보지 못한 다른 나도 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모습만 내게서 찾아냈고, 줄곧 내 한 면만 바라보았다.
급기야 내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을 까발리고자 우울하게 웅크리고 있던 내 또 다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당신은 "실망했다"라고 말했다.
나는 피카소의 괴물딱지처럼 변해버린 내 실존 그 자체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것이 내 연애의 절정이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상과 기억에서 어긋난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당신은 쉽게 "사람 잘 못 봤군, 네가 그런 인간인 줄 몰랐어. 다중인격자 같으니라고!"라고 말했다. 

완강하고 금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도 야수같이 거칠고 폭발적인 감성이란 게 있다.
다만 외부에서 강요하는 눈에 맞추어 자신을 포장하고자 그가 선택한 모습은 완고 함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교수님의 그 말에서 '어떤 것도 결코 자로 긋듯 끝나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배웠다.
그리고 이성과 감성, 엄격함과 헤픈 심성, 선하면서 악한 마음, 구속과 방종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나를 괴물 취급하고 떠난 사람들에게
여유로워질 수 있었다. 괴물이 아닌 사람은 없다.


우리는 아마 희미한 새벽이나, 어슴푸레한 초저녁 무렵에 만난 모양이다.
새벽인지 저녁인지도 모르고, 그저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빛만으로도 충분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영원을 꿈꾸었다. 그때는 우리 둘 다 미쳐 있었다. 그래 참 아름답게 미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너의 하늘에는 태양이 뜨기 시작한다. 나의 하늘은 점차 어두워져 가고, 이윽고 별과 달이 뜬다.
우리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한 사람이란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네가 해를 불러서 아침이 오고 낮이 온 것이 아니듯, 내가 애타게 원해서 저녁이 오고 밤이 온 것은 아니다. 너의 아침은 나의 밤이었다.
발악을 해도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의 사랑은 불가능해져만 갔다.



파리블루
파리의 미술관을 누비며 자신의 기억들과 맞닿은 이야기를 풀어내는『파리블루』. 이 책은 파리의 모든 것을 기억하며 추억을 끄집어내듯 미술관 스케치를 담은 것으로 낯선 이방인으로 파리를 거닐며 자신이 숨기고 싶어했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파리지앵이 가진 여유를 부러워하며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 노트르담 성당과 퐁피두 센터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자신이 갖고 있던 컴플렉스에 대하여 고백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슬픔과 우울의 그림자까지 결국은 사랑하고 있노라고 고백한다.
저자
김영숙
출판
애플북스
출판일
2008.02.28